p.61 내가 내 자신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 싯다르타가 나에게 그토록 낯설고 생판 모르는 존재로 남아 있었다는 것, 그것은 한 가지 원인, 딱 한가지 원인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나를 너무 두려워하였으며, 나는 나로부터 도망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삶이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삶의 소중한 가치가 무엇이며, 어떤 일을 할 때 내가 행복한지 등 스스로를 알아가고 찾아가는 과정이다. 독서, 사색, 일기쓰기... 스스로를 찾으려는 고단한 노력이 있어야 삶은 충만해지고 행복해진다.
p.87 나는 사색할 줄을 아오. 나는 기다릴 줄을 아오. 나는 단식할 줄을 아오.
당신은 무슨 일을 할 줄 아냐는 카밀라의 물음에 사색할 줄 알고, 기다릴 줄 알고, 단식할 줄 안다고 대답하는 싯다르타.
누군가는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대답이냐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이 조금은 엉뚱한 싯다르타의 대답에 괜히 미소가 지어졌다. 스스로를 성찰하고 인내할 줄 아는 것이 삶에 있어 중요한 ‘본질’인데 나는 일상중에 바쁘다는 핑계로 무심코 지나갈 때가 많은것같다.
p.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과 무엇인가 차이점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바로 그의 사문 정신이었다. 그는 이러한 사람의 방식을 사랑하는 동시에 경멸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자기 생각에는 그런 대가를 치를 만한 가치가 없는 것들, 그러니까 돈이나 사소한 즐거움, 하찮은 체면을 얻기 위하여 애를 쓰고 괴로워하고 늙어가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이 서로를 욕하고 모욕을 주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사문이라면 웃어넘길 수도 있는 그런 고통 때문에 그들이 괴로워하는 것을 보았으며, 사문이라면 없어도 괜찮다고 느낄 그런 것이 없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았다.
현대 사회는 타인과 함께 더불어 살아간다. 무인도 외딴 섬에서 혼자 떨어져 독야청청 살아갈수 없다. 내 옆에 있는 사람에 대한 경쟁심, 비교, 질투는 잘만 이용한다면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노력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될수 있지만, 동시에 과도한 경쟁과 질투 끝에 스스로를 병들게 할수도 있다. 타인과의 비교, 경쟁이 아니라, 어제의 나보다 오늘의 내가 더 멋지게, 그리고 열심히 살았는지에 주안점을 두며 성찰하며 살아갈 수 있다면 그 삶은 훨씬 더 행복하지 않을까.
p.114 그는 전날 저녁에 사교 모임이 있었을 경우 다음날 아침 멍한 기분으로 피로감을 느끼면서 오랫동안 드러누워 있는 일이 점점 더 잦아졌다. 카마스와미가 온갖 근심을 늘어놓아 지겹게 할 대면 그는 참지 못하고 성급하게 화를 내기도 하였다. 그의 얼굴은 아직까지는 여전히 다른 사람들보다 더 영리하고 지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의 얼굴은 웃움을 띠는 일이 거의 없었으며, 부유한 사람들의 얼굴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그런 표정들, 그러니까 불만스런 표정, 기분 나빠하는 표정, 우울한 표정, 나태한 표정, 몰인정한 표정을 하나둘씩 시작하였다. 서서히 그는 부자들이 잘 걸리는 영혼의 병에 걸렸다.
일에 대해 조금씩 집착하기 시작하고, 세상에 찌들어가는 모습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싯다르타. 장사하는 법, 돈을 버는 법 등 세상의 일들을 배우며 조금씩 변해가는 싯타르타를 보며 마음이 아팠다. 마음의 중심을 지켜가며 세상을 살아가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중용’.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마음의 중심을 잘 지키는 살아가고 싶은데, 어떤 일을 할 때 있어 너무 과하거나 부족할 때가 많다. 비전, 일,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운동... 모든 일에 있어 마음의 중심을 잘 잡는 사람이고 싶다.
p.206 지식은 전달할 수가 있지만, 그러나 지혜는 전달할 수가 없는 법이야.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으며, 지혜를 체험할 수 있으며, 지혜를 지니고 다닐 수도 있으며, 지혜로써 기적을 행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지혜를 말하고 가르칠 수는 없네.
p. 209 나는 나 자신의 육신의 경험과 나 자신의 영혼의 경험을 통하여 이 세상을 혐오하는 일을 그만두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하여, 이 세상을 이제 더 이상 내가 소망하는 그 어떤 세상, 내가 상상하고 있는 그 어떤 세상, 내가 머릿속으로 생각해 낸 일종의 완벽한 상태와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놔둔 채 그 세상 자체를 사랑하기 위하여, 내가 죄악을 매우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내가 관능적 쾌락, 재물에 대한 욕심, 허영심을 필요로 하였다는 것을,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절망 상태도 피료로 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네.
군대를 전역 한후 대학교에 복학하고 책에 빠져 살았던 적이 있다. 집중하기 위해 핸드폰은 사물함에 넣어놓고, 도서관 한 곳에 자리를 잡고 책을 읽었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책을 읽고, 잠시 멈춰 그 의미를 생각하고, 동시에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그 시간이 참 행복하고 좋았다. 지금의 내가 경제 공부를 열심히 하는 이유도, 그때 그 시절의 내가 너무나 그리워서다.
경제적인 자유를 얻어 내 삶에 있어 돈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부동산 공부, 독서,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시간 보내기 등, 온전히 내가 하고싶은 일들을 하며 살아갈수 있기 때문이다. ‘생산자’의 삶을 살기 위해 오늘도 경제공부를 하고 책을 읽는다. 푸릉 독서모임을 신청한 것도 ‘경제적 자유’와 ‘생산자의 삶’을 위한 한 걸음이다. 그리고 그 길을 걸어가는 가운데 내가 무엇을 위해 열심히 살아가는지 ‘본질’을 잊지 않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삶을 살겠다고 다짐해본다.